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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서 (객원 에디터)
디자인MHTL
사진 출처빌리프랩

제이크에게로 니키가 던진 체스 말이 날아온다. 붉은색 킹이다. 체스판 위에서 그 적수인 성훈의 순백색 말과 제이크의 말은 결투를 벌인다. 지난 5월 23일 공개된 ‘ENHYPEN (엔하이픈) DESIRE : UNLEASH Preview’ 속 이 장면처럼, 엔하이픈의 사랑 이야기는 체스판 위 말들의 움직임처럼 치열하면서도 절제된 감정들이 오간다. 사랑에 대한 부정(‘Polaroid Love’)부터 불안(‘No Doubt’) 또는 질투(‘Brought The Heat Back’)까지, 엔하이픈의 노래 속 그들의 사랑은 어떤 방향으로든 뜨겁다. 불멸의 삶을 사는 존재가 유한한 인간을 사랑할 때 벌어지는 뜨거운 비극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인간을 사랑하기에, 이 유한하고 약한 존재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한다. 그들은 ‘Still Monster’에서 스스로가 지닌 강력하지만 위험한 속성을 ‘괴물’이라 명명하고, “감히 널” “갈망”하면서도 “유일한 Savior”이자 사랑을 가르쳐준 연인을 보호하기 위해 ‘괴물’ 같은 스스로를 억누른다. 그리고 ‘XO(Only If You Say Yes)’에서는 “멋진 차와 집이 필요”하면 내어주고, “해도 달도 따다”줄 수 있다면서도 상대에게 “허락의 말”을 구한다. 스스로가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뱀파이어에게 사랑이란 상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줄을 쥐어주는 일인 것이다.

‘DESIRE : UNLEASH’ 이전에 발표됐던 ‘No Doubt’의 뮤직비디오는 바닷가재의 팔을 키워낸 니키가 문을 부수면서 끝난다. 오래 살수록 강해지는 바닷가재는 영생을 긍정하는 키워드이자, 뱀파이어의 힘으로 원하는 바를 쟁취할 수 있다는 암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문을 부수고 나간 멤버들은 새 앨범의 서사를 알리는 ‘DESIRE Concept Cinema’에서 사랑할수록 상대방을 파괴하고 싶어지는 그들의 ‘저주’를 긍정한다. 그리고 흡혈 직후의 장면을 TV 방송에서 그대로 노출한다. “I wanna be seen to remind you I exist. To remind myself”. 뱀파이어가 그들의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그리고 그들이 숨겨왔던 어둠 속의 욕망을 드러낸다. 앨범의 첫 곡 제목이기도 한 ‘Flashover(밀폐된 공간에서 직접 노출된 가연성 물질의 대부분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는 현상)’는 밀폐된 공간에서만 일어난다. ‘No Doubt’에서 출구(exit) 없는 공간 속 답답함을 느끼던 멤버들의 감정은 ‘Flashover’를 통해 폭발한다. “금길 깨고 화염이 되어 난 / 끈을 놓아가”. ‘Outside’는 보다 노골적이다. 연인에게 선을 넘어 “내 세계”로 함께 달리자고 제안한다. 그간 연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던 것이 무색하게, “너를 지킨다던 의지 / 이젠 중요하지 않지”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이처럼 강렬한 “욕망의 소리”는 곡 전반을 지배하는 댐핑감이 강한 랩을 통해 표출된다. 뱀파이어의 진심을 깊게 탐구하는 엔하이픈에게, ‘DESIRE : UNLEASH’는 그간 그들이 오갔던 불멸과 필멸 사이의 존재론적 고민보다 거침없는 본능이 전하는 욕망의 발산을 보여주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뱀파이어는 ‘Flashover’와 ‘Outside’ 사이에 놓인 타이틀 곡, ‘Bad Desire (With or Without You)’에서 고뇌에 휩싸인 것처럼 보인다. 주어진 것인가, 쟁취한 것인가? 길들여질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축복받은 것인가, 저주받은 것인가? 데뷔 당시부터 끊임없이 두 가지 명제 사이에서 고민하던 엔하이픈은 ‘or’를 통해 다시 한번 고민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 오래 함께하기 위해 그 사람에게 나의 운명을 함께 뒤집어쓰게 할 것인가, 짧은 시간을 사랑하더라도 내 운명으로부터 상대방을 지킬 것인가. “투명한 널” 지키고 싶은 자아와 “영겁 같은 시간을 함께할 저주를 내려도 / 넌 결국 날 위해 기쁘게 웃을 거라서”와 같이 이기적인 자아가 번갈아 노래한다. “너를 잃은 천국”과 “너를 안은 지옥”을 오가는 내적 갈등을 반영하듯 퍼포먼스 역시 머리를 움켜쥐고 고민하거나 답을 구하듯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박자에 맞춰 여러 동작들을 빠르게 선보이며 긴장감을 극대화했다가 순간적으로 몸을 길게 늘이면서 이완의 순간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마치 “Tell me all your deepest” 속 ‘me’는 엔하이픈과 함께하는 혹은 그들의 일부인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흡혈로 상징되는 뱀파이어의 욕망과 연인에게만큼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 마치 에고(Ego)와 얼터 에고(Alter ego)의 싸움처럼, ‘DESIRE : UNLEASH’는 뱀파이어의 두 마음이 끊임없이 부딪히는 내면을 묘사한다. 욕망과 통제. 

‘Flash Over’는 “더 타올라 미쳐가 난 / You should take this fire with me”라고 노래하며 뱀파이어의 감정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전개를 급변하면서 비트를 ‘드롭(Drop)’한다. 카타르시스를 줄 순간 오히려 드라마틱한 변화를 통해 긴장감을 주는 이 변화는 ‘DESIRE : UNLEASH’의 정서이기도 하다. 뱀파이어의 욕망은 절대로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 욕망을 드러내고 원하는 대로 해야 할지 그래서 너와 함께할지 ‘or’ 욕망을 억제해야 할지 고민한다. ‘Bad Desire (With or Without You)’의 코러스 파트 중 “나를 태우는 이 beautiful fire / It’s all my bad desire‬”는 고음이나 애드리브 등의 기교 없이 하강의 멜로디로 종결된다. “이럼 안 돼‬ Don’t touch, don’t do it ‬/‭ 널 향한 내 손을 막아도 /‬ 닿을 듯 커다란 저 달이‬ 내 욕망을 붉게 물들여”에서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며 발음을 세게 끊는 창법처럼, ‘Bad Desire (With or Without You)’는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표현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막아보고 싶어 하는 감정적인 충돌을 담는다. 저 멀리서 “All your bad desires”를 꺼내 보라는 듯 더해진 거리감을 주는 얼터 에고와도 같은 내면의 유혹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갈등은 엔하이픈 멤버들의 보컬이 전하는 감정을 통해 팽팽한 긴장감으로 이어진다. ‘With’와 ‘Without’ 사이, ‘or’에서 머물며 자신을 억제하는 뱀파이어가 주는 어두운 긴장감이야말로 ‘나쁜 욕망’을 갖게 된 뱀파이어의 매력이다. 

‘Loose’는 어둡고 긴장감이 넘치던 앞의 세 곡과 달리 제목만큼 한결 풀어진 정서로 앨범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Loose’, ‘Helium’, ‘Too Close’는 전반적으로 밝은 분위기로 사랑을 노래한다. 하지만 ‘Too Close’가 한없이 가깝지만 아직은 닿을 수 없는 아슬아슬한 거리를 노래하는 것처럼, ‘Loose’는 가성을 능숙히 활용하는 멤버들의 보컬 센스로 상대방을 방심하게 하면서 유혹한다. 제이가 프로듀싱한 ‘Helium’은 끓는점이 가장 낮은 원소 헬륨처럼, 작은 자극에도 과감하게 끓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록 사운드로 풀어낸다. 곡 전반에 깔리는 베이스 사운드가 박진감을 부여하는 가운데 멤버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들은 나른하지만 유혹적이고, 언제든지 끓어오를 준비가 돼 있다. 이처럼 밝은 분위기의 곡들에서도 ‘DESIRE : UNLEASH’는 상반되거나 곧 터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감정을 음악적으로 구현하면서 조금씩 긴장감을 부여한다. 영어 곡을 제외하고 이번 앨범에서 사실상 마지막 트랙인 ‘Too Close’는 제목만으로도 앨범에서 엔하이픈이 일관되게 표현하는 정서를 전달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한없이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종종 리듬감 넘치는 피아노 사운드와 떨리는 목소리, 날것의 호흡이 그대로 전해지는 보컬만 놓이는 코러스 파트는 마치 멤버들이 코앞에서 고백하는 것 같은 정서를 전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 사이에도 “I gotta move back”을 되뇐다. “날 태연히 자극”하는 “너”가 “온 신경이 녹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래서 “더는 못 참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가사를 부르는 목소리는 지극히 절제돼 있다. 욕망을 실현하겠다는 다짐일까, 실현할 수 없음을 아는 탄식일까.

다시 체스판 위로 돌아가보자. 성훈의 순백색 퀸은 적진을 가로질러 붉은 킹의 코앞까지 미끄러진다. 그러나 어떤 붉은 말도 감히 여왕을 건드리지 않는다. 체스에서 킹은 쓰러지지 않는다. 체크메이트가 선언되면 게임은 그저 끝날 뿐이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만큼은 다르다. 붉은 왕이 순백의 여왕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 장면은 한때 “세상이란 나의 체스판”(‘Teeth’)이라 호기롭게 말하던 뱀파이어 소년들이 사랑 앞에서는 쉽게 항복하는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저주”라고 표현될 법한 내면의 어둠을 거침없이 드러낸 지금도 그들의 순정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To be with you, or to not be with you”—질문을 던지는 주체는 그들이지만, 대답할 권리는 오롯이 상대에게 맡겨져 있다. 결국 ‘DESIRE : UNLEASH’에서 엔하이픈의 욕망은 해방된 동시에 해소될 수는 없다. 상대방이 답을 주지 않았기에. ‘Bad Desire(With or Without You)’의 안무가 고뇌하듯 몸을 감싸며 시작하여 같은 동작으로 끝나듯, 그들의 번뇌는 끝나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상대의 의지부터 확인하는 것. 그래서 이 뱀파이어들은 지금도 속삭인다. “너만이 나를 길들일 수 있어.” 가장 위험한 존재인 뱀파이어가, 오직 한 사람에게만은 기꺼이 길들여지겠다고 말하는 것. 이 역설적 고백이, 엔하이픈의 사랑을 완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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